내용
기획의도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문화를 ‘의미들의 망’이라고 규정했다. 언어, 몸짓, 사물 등이 내포하는 의미들로 얼기설기 엮인 망.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므로, 그 망의 생김새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멸망한 나라’의 망은 어떤 모습일까.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2017년 마지막 전시, 황윤정 작가의 《멸망한 나라의 글자들》을 진행한다. 아이공의 올해 마지막 신진작가지원전이기도 한 본 전시에서 작가는 예측과 통제를 비껴가는 언어와 사고를 다룬 네 편의 영상을 선보인다. 작품들은 변형하고 콜라주한 오래된 홈 비디오와 영화, 직접 촬영한 영상 등에 기반한다. 아날로그적인 정취가 짙고, 화려한 입체감을 자랑하는 3D, VR 영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관람자에게 ‘시청’보다는 ‘체험’에 가까운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들이랄 만하다. 비균질적인 문장, 종잡을 수 없는 소리, 비정형적인 서사,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이 모든 게 조화와 부조화를 이루기를 반복하며 고유한 ‘의미들의 망’을 직조해내고 관람자가 은연중에 갖고 있던 내밀한 기억과 상상을 건져 올리기 때문이다.
황윤정 작가의 작품들은 ‘비디오 콜라주’, ‘오디오비주얼 에세이’, 또는 ‘퍼포먼스 영상’과 같은 특정 장르로 간편하게 수렴되지 않는다. 작가는 영상과 문학이 중첩된 복합장르적인 작품들을 통해 흡사 멸망한 나라에서 빌려온 듯한, 파편화된 말과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나아가 관람자로 하여금 언어와 표상이 내재하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작품 <준>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은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일 터.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아주 많았거나 하나도 없었다.’
전시연계행사 : 매칭토크&리셉션
뮌(미디어 아티스트) X 황윤정
2017.12.15.금 오후 6시
*아이공의 매칭토크 프로그램은 토크와 원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칭원고 전문은 전시기간 동안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노트
“상해를 겪은 뒤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나의 삶이 의존하는 사람들, 내가 알지 못하고 또 결코 알 수도 없을 사람들이 저기 밖에 있다는 점이다.”¹
그것은 절대적인 공포일 수밖에 없다. 내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말이나 생각, 혹은 살갗과 손톱, 액체와 고체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돌연 나의 어떤 부분을 돌이킬 수 없이 파고들거나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 저 밖에 그것들, 그 말들, 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훼손당할 삶을 살고 있다. 버틀러의 말처럼 그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훼손은 서로가 서로의 발치 아래에 적어 내려가는 글자가 서로에게 읽히거나 읽히지 않을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어 일어난다.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된 글자들의 나라에서 말과 이미지들은 빌려온 것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잃거나, 일시적인 정지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어느 곳에도 들어가거나 환대받을 수 없는 복도의 유령 상태에 갇혀버리기도 한다. 두 가지 상태는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사실은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말의 유실, 삶의 고착을 포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잃어버린 것이나 일시적으로 머물렀거나 머무르고 있는 곳은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 끊임없이 훼손당하고 침입당하고 상해를 입으면서 좁다란 통로를 통과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대부분의 경우 조금씩 깎여나가면서, 가끔은 스스로 어떤 부분을 잘라내기도 하면서 결국 우리는 만나야만 한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고, 굳어버린 다리를 움직여 고되게 이 긴 밤을 지나가야만 한다.
¹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12p
작가 약력
황윤정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 후 크고 작은 일들에 참여하며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중이다. 2012년 12월, 아트티 갤러리에서 <풋풋>이라는 이름의 그룹전을 가졌으며 2013년 12월, 동일하게 아트티 갤러리에서 <프롤로그>라는 그룹전에 참가하였다. 2014년 6월 갤러리 토픽에서 그룹전 <문득>에 참여한 이후 2015년 일단멈춤에서 2인전 <망망>을 기획해 작은 드로잉 전을 가졌으며 2015년 8월 제15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의 대안장르 부문에서 <최후변론>을, 2016년 제16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의 글로컬구애전 부문에서 <Post Babel>을 상영했다.